신명기 11장 18 32절 말씀
- 말씀을 마음과 뜻에 두고 살라고 하십니다(18-25).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또 그것을 너희의 손목에 매어 기호로 삼고 너희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또 그것을 너희의 자녀에게 가르치며 집에 앉아 있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하고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여호와께서 너희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서 너희의 날과 너희의 자녀의 날이 많아서 하늘이 땅을 덮는 날과 같으리라”. 지금도 이스라엘에 가면 18-21절 말씀대로 행하는 유대인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세계의 많은 유대인들, 유대교 종교인들은 지금도 이런 외형과 행위를 하면서 살아갑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이나 사두개인들 중에 이런 삶을 사는 분들이 많으셨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화 있을지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라고 복을 선포하지 않고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땅에 사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철저히 지키지만, 아랍인들을 무자비하게 죽이는 일에 앞장서기도 하고, 무참한 학살에 가까운 전쟁을 하고, 아랍인들을 차별하고, 그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삶을 힘쓰기도 합니다. 말씀을 따라 사는 것 같은데, 왜 사랑이 없고, 왜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화를 선포하셨을까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복을 선포하지 않고 화를 선포하셨을까요? 그것은 외형과 지키고 마음과 뜻은 다른 곳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경을 100독, 200독, 300독을 하면 뭐하겠습니까? “너희는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라는 말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면 말입니다. 마음과 뜻에 말씀을 두지 않으면서 암송은 1000구절을 하고, 성경통독은 100독, 300독, 1000독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이나 서기관처럼 존경을 받고 살고, 특권을 누리고 살지만,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미워하고 전쟁하고, 죽이는 삶에 참여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마에 말씀을 붙이고 다니는 삶보다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사는 삶에 더 힘써야 합니다. 손목에 말씀 상자를 들고 다니는 것보다 핸드폰에 성경을 저장해주고, 프로그램을 많이 깔아 놓는 것보다 “나의 이 말을 너희의 마음과 뜻에 두고” 사는 삶에 힘써야겠습니다. 자녀에게 성경을 암송시키고, 집에 가서 성경에 액자로도 있고, 여기 저기 붙어 있는데, “마음과 뜻”에 말씀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마음과 뜻에 말씀을 둔다는 것은 말씀암송을 많이 한 것도 아니고, 성경을 많이 읽은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이 늘 생각나고,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사는 것입니다. 사랑없는 만남이 헛된 것처럼, 존경함이 없는 선물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말씀을 사랑함이 없는 수많은 성경읽기, 공부, 암송은 헛됩니다. 더욱 더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경건한 삶을 살아가면 참 좋겠습니다.
2. 복과 저주를 두신 하나님(26-32). 하나님 말씀을 따라 살면 복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으면 저주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애발 산과 그리심 산에서 축복과 저주를 선포합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오늘 너희 앞에서 베푸는 모든 규례와 법도를 너희는 지켜 행할지니라”라고 하십니다. 지킴, 순종, 즉 성경이 요구하는 지킴과 순종은 비인격인 것이거나, 억지로 하는 것이나 복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거나, 성공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거듭 말씀드렸던 것처럼 군대에서 명령하면 순종하는 것도 아니고, 회사에서 오더를 따내는 것도 아니고,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명령과 순종은 오직 사랑 안에서 명령하심이요, 사랑 안에서 순종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랑으로 받은 사람만, 말씀을 사랑으로 순종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복받기 위한 마음으로 받은 사람은 말씀을 복받는 도구로서 순종하게 됩니다. 사랑함으로 말씀을 받고, 사랑함으로 말씀을 순종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면 참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