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8장 1 22절 말씀
- 말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는지를 판단합니다(1-4).
“수아 사람 빌닷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어느 때까지 이런 말을 하겠으며 어느 때까지 네 입의 말이 거센 바람과 같겠는가”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1장과 2장에서 욥은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고 하시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고 했는데, 수아 사람 빌닷은 하나님보다 더 높은 수준에서 말합니다. 더 대단한 것을 원합니다. 때로는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합니다. 빌닷이 그런 요구를 할 자격이 없습니다. 때로는 목사님들도 성도님들에게 하나님보다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하곤 합니다. 때로는 성도님들도 목사님들에게 하나님보다 더 높은 수준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별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요구하는 사랑이 아니라 주시는 사랑을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거의 없으셨습니다. 수아 사람 빌닷은 고난 당하는 욥의 말을 가지고 욥을 비난합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말로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수아 사람 빌닷은 결과를 가지고 비난합니다. “네 자녀들이 주께 죄를 지었으므로 주께서 그들을 그 죄에 버려주셨나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1장에서 욥이 얼마나 자녀들을 죄에서 벗어나도록 하고, 미리 미리 예방하였는지를 잘 보았습니다. 욥의 아들들이 죽었다고 해서 욥의 자녀들이 빌닷의 자녀보다 더 죄인일까요? 눅13장에서 이렇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라고 하십니다. 결과를 가지고 판단하는 일은 참으로 가슴 아프게 하는 일입니다. 힘든 일을 당한 사람을 영적으로까지 더 힘들게 하는 일이며, 어쩌면 사탄보다 더 욥을 힘들게 합니다. 시어머니보다 시누이가 더 힘들게 하듯이 그런 경우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결과 중심, 말 중심으로 사람을 판단하기 보다는 복음 안에서 사람을 보고, 하나님께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 깊은 뜻 안에서 겸손하게 사람을 대하는 삶을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2. 기도하라고 하고, 배우라고 합니다(5-22). 욥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을 찾으며 전능하신 이에게 간구하고 또 청결하고 정직하면 반드시 너를 돌보시고 네 의로운 처소를 평안하게 하실 것이라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기도하면 회복된다고 하는 말을 너무 쉽게 쓰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기도해야 하지만, 기도 안해서 그렇다, 기도하면 된다고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기도 안해도 욥처럼 고난 당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기도한다고 해서 갈멜 사람 나발처럼 잘 사는 사람도 드물고, 삼성 이건회 회장처럼 부자되는 사람도 드뭅니다. 너무 기도를 만병통치약처럼 말하는 것은 큰 상처가 됩니다. 욥이 빌닷보다 기도하지 않아서 이런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1,2장에 너무 분명하게 드러나 있지 않습니까? 기도하라고 권면하기 보다는 그냥 빌닷이 조용히 욥을 위해서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빌닷은 배우라고 합니다. “청하건대 너는 옛 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조상들이 터득한 일을 배울지어다 그들이 네게 가르쳐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그 마음에서 나오는 말을 하지 아니하겠느냐”라고 합니다. 욥이 빌닷보다 배움이 부족해서 그런 것은 아닌데도 어려움을 겪으면 저분에게 가서 배우라고 하고, 이런 저런 성경공부나 기독교 모임에 사람들을 자꾸 가보라고 합니다. 못 배워서 욥이 고난 당합니까? 내 주변에 못 배운 사람들이 고난 당하는 것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초등학교만 나와도 고난 없이 살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박사까지 하고, 교회에서 하는 성경공부나 활동은 빠짐없이 다닌 분들도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 허다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런 말입니다. “이런 것은 새 순이 돋아 아직 뜯을 때가 되기 전에 다른 풀보다 일찍이 마르느니라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자의 길은 다 이와같고 조속한 자의 희망은 무너지리니 그가 믿는 것이 끊어지고 그가 의지하는 것이 거미줄 같은즉 그 집을 의지할지라도 집이 서지 못하고 굳게 붙잡아 주어도 집이 보존되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욥을 빗대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정말 우리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고난 당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위로하는 일, 섬기는 일을 하면 좋겠습니다. 혹시 내가 생각하기에 그가 죄를 범하여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 같아도 입술을 굳게 닫고 있어야 합니다. 반대로 죄를 범하면서 형통하고, 죄를 범하면서 승승장구하고, 권력자가 되어가는 사람에게는 찾아가서 말해야 합니다. 이것이 선지자들의 삶이었습니다. 우리는 반대로 합니다. 고난 당하는 사람에게는 말하고, 승숭장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직언을 하기 보다는 축복하고 아부하는 말을 합니다. 선지자적 삶을 왜 고난 당하는 사람에게 하는지 이해가 안될 때가 많습니다. 부디 선지자적 삶을 살려면 말씀을 전하려면 나를 죽일 힘이 있는 왕이나 포악한 부자나 잔인한 권력자들에게 가서 말하면 좋겠습니다. 우리 주변에 평범하고 연약하고, 밑바닥에 내려 앉아서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선지자 노릇하는 것은 거짓 선지자가 아닐까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