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12장 9 21절 말씀
1. 안식일에 선을 행하시는 예수님(9-13). 안식일은 창조의 일곱째 날이며, 창조입니다. 창세기 1장에 창조하실 때마다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딤전4장에서 말합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한다는 말은 단순히 착한 일을 한다는 의미를 넘어섭니다. 예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말하고, 예수님이 하시는 것이 창1장의 창조와 같이 보시기에 좋은 것이며, 심히 좋은 것임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통해서만 안식이 옵니다. 이 손 마른 사람을 성하게, 즉 온전하게 하는 것은 바로 율법과 선지자를 완전하게 하러 왔다는 말씀의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모든 율법과 선지자가 말한 좋은 것, 온전한 것은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성취되고 완성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주인된 삶입니다. 11절에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고 하십니다. 손 마른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하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가 안식을 누립니다. 생각해 봅시다. 자기가 잘못 해서 구덩이에 빠졌으니 고생 좀 해야 한다며 양을 끌어내지 않는 주인은 사랑이 부족합니다. 훈련해야 한다고, 배워야 한다고 하는 논리로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고, 사랑의 주인됨이 없이 지적하고, 미워하고, 법대로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율법대로 대하지 않고, 율법을 넘어서는 사랑으로 대해주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율법이 다 표현할 수 없었던, 율법이 다 나타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성취하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이며, 그 사랑을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 하나 하나를 통해서 느끼고 고백하면서 안식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더욱 더 예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도록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참 안식이시며,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고백합시다. 16-21절에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이사야 42장의 말씀을 통해서 말합니다. 안식일을 아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을 아는 것이 더 중하기 때문입니다. 더욱 더 안식일 규례보다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압시다. 그러면 온전하게 안식일도 알지 않겠습니까? 2. 악을 행하는 사람들(10, 14-15).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따라 산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구보다도 더 실천하고, 누구보다도 더 적용을 잘하면서 대중들에게 종교적인 행위들로 인정받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마음은 10절에 나온 것처럼 안식일에도 고발하려고 이런 저런 음모를 꾸미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악을 행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을까요? 우리가 보기에도 안 좋은데요. 이들은 다른 사람의 죄악을 들추어 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보시기에 심히 좋도록 창조하시고, 사람들의 죄와 허물을 감추시고, 사하시고, 용서하시는 일을 하시는데 이들은 이렇게 고발, 즉 정죄하고 14절에서는 죽이려고 의논합니다. 이들은 죄와 사망의 법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을 사람의 행위에 관한 말씀으로 보면 이렇게 죄와 사망의 법으로 삽니다. 그러나, 율법과 선지자를 하나님의 사랑이요, 창조요, 예수님의 구속의 말씀으로 보면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보면서 삽니다. 안식일에 악을 행하는 사람들처럼 살지 맙시다. 정죄하지 맙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죄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정죄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님 안에 있지 않습니다.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해야 하고,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덮어 주어야 합니다.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살리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요,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사신 삶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