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4장 31 44절 말씀
- 말씀의 권위가 있는 예수님(31-37).
예수님에게는 말씀을 전할 때 권위가 있었다고 32절에서 말합니다. 또한 36절에도 이 어떠한 말씀이고 권위와 능력으로 더러운 귀신을 쫓아낸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권위가 있습니다. 능력이 있습니다. 귀신을 물러가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귀신은 사단의 세력을 의미합니다. 사단의 권세, 사단의 나라, 사단의 지혜, 사단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서 물러가게 하는 힘이 말씀에 있습니다. 말씀을 읽는 삶, 말씀을 묵상하는 삶, 말씀을 사랑하는 삶을 살다보면 나도 모르게 내 인생이 거룩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이 단조롭고, 번민도 없고, 생각이 명쾌하고, 삶이 군더더기가 없어짐을 느낍니다. 말씀으로 인한 힘이고, 역사고, 말씀이 우리의 삶을 청소하고, 우리의 삶을 재정립하고, 새창조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전한 말씀이 예수님의 말씀이듯이 우리가 읽는 성경말씀도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을 사랑하고, 간절한 심령으로 받고, 인격적으로 받으면 말씀의 권위와 능력이 우리의 삶에도 나타날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말씀이며 그 말씀에 권위와 능력이 있음을 고백하면서 읽읍시다.
2. 온갖 병자들을 고치시는 예수님(38-44). 예수님은 베드로의 장모로부터 시작해서 해질 때까지 온갖 병자들을 일일이 손을 얹으사 고치셨다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들을 떠나지 못하도록 만류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다른 곳에서도 복음을 전하여야 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말씀의 권위가 있었습니다. 말씀으로만 하셔서 병이 고쳐 질 수 있지만, 일일이 손을 얹으셔서 고치셨습니다. 이렇게 하신 것은 말씀은 능력임을 말하는 것보다는 사랑임을 말합니다. 손이 그 몸에 얹혀질 때, 만져질 때 이들은 사랑을 느낍니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은 사람들을 몸소 만나고, 실제로 사랑함을 느끼게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그러나,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 안으로 들어오신 분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가야하는 육신의 한계 속에서 임재하시기 때문에 다른 곳에 가셔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떠나기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아무 제약이 없는 하나님의 형상으로가 아니라 육신의 제약, 배고픔, 공간과 시간에 갇힌 존재로서 사랑하시는 삶을 사시는 예수님은 떠남과 걸음, 피곤함과 서운함, 눈물과 아픔을 겪으면서 사람들과 헤어지고, 피곤하셔서 쉬시고, 배고프고, 목마름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만나시고, 일일이 손을 얹어서 기도해 주시고 안수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 이 땅을 사셨습니다. 오늘도 나같은 사람에게 때로는 성육신하신 것처럼 음성으로 말씀해주시고, 성육신 하셔서 육신이 있는 몸처럼 따뜻하게 위로하고 안아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베드로의 장모처럼 느끼고, 때로는 야이로의 딸처럼 느끼고, 때로는 내 곁을 떠나 그렇게 가시듯이 가시면서 다른 사람에게도 복음을 전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형상으로 보이실 때마다 깊은 체험과 아쉬운 떠남이라는 놀람과 경이로움, 그 뒤에 이어지는 영적 체험 이후에 오는 외로움, 떠나심과 부재감을 오가면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래도 좋고, 행복합니다. 잠깐의 안수하심, 손을 얹어주심으로도 평생에 행복이 되고도 남으니 말입니다. 떠나가심의 아쉬움도 주님을 사랑하며 기다리는 힘이 되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런 저런 모양으로 나와 우리 가족, 우리 교회에 찾아오시는 주님을 찬양합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