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7장 18 35절 말씀
- 요한의 질문과 답변(18-23).
세례요한은 자신이 예수님을 알았고, 만났고, 증거했음에도 이런 질문을 합니다. “오실 그이게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세례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에 오실 그이게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이까 라고 질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병자들을 돌보시고,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되고 있다고 하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합니다. 요한도 실족할 위험이 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감옥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외로움과 아픔과 고통을 겪어서 일 수도 있고, 우리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세례요한에게 실족함의 위험성이 있었다면, 예수님에 대한 의문과 불확실성이 있었다면 누구이게나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실족할 위험성이 있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때 세례요한이 직접 제자들을 보내서 확인합니다. 예수님의 답변을 듣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감옥에 있으면서 헤롯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의로운 인생을 살다가 죽습니다. 우리도 실족함의 위험성이 있을 때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확인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를 하면서 그런 확인, 그런 재점검의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행적, 병고침,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모습들을 보면서 세례요한처럼 실족하지 않는 사람, 복있는 사람으로 살아갑시다.
2. 요한을 왜 보러 광야에 왔는가?(24-35). 세례요한을 보려고 왜 광야에 왔느냐고 질문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를 보러 왔느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을 보러 왔느냐,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는 사람을 만나러 왔느냐, 무엇을 보려고 왔느냐 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례요한을 보러 온 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아름다움, 부드러움, 갈대 같은 사람들, 왕궁과 같은 건물을 보러 온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교회에 올 떄는 화려한 옷, 부드러운 옷, 갈대 같은 사람들에 대한 관심, 교회의 화려함과 아름다움, 왕궁 못지 않는 건물의 웅장함도 맛보면서 교회를 다니려고 합니다. 세례요한을 보러 광야에 온 사람들처럼 우리도 순수하게 예수님을 전하는 말씀, 예수님께로 자신을 이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러 교회에 가야 합니다. 광야는 고독합니다. 광야는 조용합니다. 광야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광야는 부드럽지 않습니다. 광야는 화려하지 않습니다. 광야는 건물도 없습니다. 그런 광야지만, 그곳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가듯이 그렇게 교회에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의심하는 세례요한을 확실히 증거합니다. 그가 얼마나 귀한 선지자요, 선지자보다 나은 사람인지를 말3:1절과 이사야40장의 말씀을 통해서 증거합니다. 세례요한의 삶에서 많은 사람들이 반응이 없고 냉담함에 대해서도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삶을 문제 삼지 않고, 사람들의 악함과 무감각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도다 함과 같도다 세례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사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라고 비난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세례요한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세례요한이 얼마나 귀한 하나님의 사람이며, 참 선지자이며, 얼마나 검소하고 경건하게 살았는지를 증거하십니다. 자신에 대해서 의심하고, 실족할 위험에 처하기도 했던 요한을 향해서 이렇게 귀하게 여겨 주십니다. 예수님이 요한을 이렇게 대해 주심이 우리에게는 용기와 힘이 됩니다. 저도 실족함의 위기, 절망, 낙담, 의심...이 있었다고 저를 주님이 부인하지 않으시리라 생각하니 힘이 납니다. 이런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생각하면서 더욱 주님을 사랑하면서 살아갑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