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9장 51 62절 말씀
- 예루살렘으로 올라기시는 예수님(51-56).
예수님은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를 결심하십니다. 왜냐하면, 승천은 고난과 죽음 이후의 여정이기 때문에 굳게 결심하셨다고 합니다. 수치와 모욕, 단절과 고통의 십자가의 시간을 지나야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 여정을 가는 예수님은 모든 것을 사랑으로 참으시고, 견디셔야 했습니다. 사마리아를 지나가는 길에 예수님을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자, 제자들이 하늘에서 불을 내려 멸하게 하자고 하자 돌아보면서 꾸짖습니다. 함꼐 다른 마을로 가자고 하십니다. 우리는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하셨던 말씀대로 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10장, 누가복음 9장에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영접하는 집에 들어가고, 영접하지 않는 집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영접하지 않는 사마리아를 그냥 지나가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평생 사랑으로 걸어가십니다. 자신을 버리는 사람들,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위해서 죽으십니다. 우리도 오늘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 분들에게 제자들처럼 분노하고, 저주하고, 망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사랑 안에서 참고, 기다리며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예수님을 따라 갑시다.
2.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하시는 말씀(57-60).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여우보다 더 못한 삶, 공중의 새보다 더 못한 삶의 자리에 들어가는 나를 어떻게 따르려고 하느냐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여우만도 못한 자리, 궁중의 새만도 못한 자리, 즉 십자가를 지시는 삶을 사시고, 그 길을 가는데 정말 어디든지 따르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합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아버지를 장사하게 하락해 달라고 합니다. 그도 역시 십자가의 길을 가는 예수님, 곧 죽으시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아버지의 죽음보다 더 임박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음을 말합니다. 아버지가 죽었다면 그 사람이 이 자리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아버지보다 자신이 먼저 죽을 것이고, 아버지를 장사 지내는 일을 하고 난다면 나를 따를 기회는 없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가까움을 표현하십니다. 또 다른 사람이 말합니다. 가족과 작별하고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난미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합니다. 손에 쟁기를 잡은 사람은 앞을 똑바로 보면서 밭을 갈아야 합니다. 지금은 가족을 돌아볼 때는 아닙니다. 지금은 곧 십자가를 지실 예수님만 바라보고 따라가야 할 때입니다. 가족들과 작별하는 일은 얼마든지 나중에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면서도 예수님의 십자가도 모르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이 가시는 길도 모르고,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예수님과 한 마음을 품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 말씀을 가족을 버리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작별을 하는 것이 죄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를 수 없다는 말도 아닙니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이 어디로 가든지 따를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시는 일을 오직 예수님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제한적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아버지를 장시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장례를 치른 후에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면서 장례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향유 부은 여인처럼 예수님의 장례를 준비해야 할 때입니다. 지금은 가족과 작별할 때가 아니라 예수님과 작별할 때입니다. 예수님도 잘 모르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살아가는 삶도 잘 모르는 우리가 자주 하는 일이며, 이 말씀으로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왜곡된 부분도 있는 말씀입니다. 저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를 알려 주시고, 복음 안에서 불러 주시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